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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루에서 깨달은 노동주의 참맛

2024.02.29


오타루에서 깨달은 노동주의 참맛

제주에서 스냅 사진을 시작하면서 매년 ‘올해도 위기입니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자영업은 멘탈 싸움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문제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것.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번 겨울 몇 개월을 북해도에서 보냈다. 여행이 아니라, 일을 하러 갔다.


글, 사진│엄지사진관

북해도는 우리에게 삿포로라는 도시 명칭으로 더 익숙하다. 내가 지냈던 곳은 오타루라는 작은 도시였다. 삿포로에서 1시간쯤 떨어진 곳이지만, 한국인 관광객이 당일치기로 많이 온다. 최근 《윤희에게》라는 영화로 재조명된 곳이기도 하다.

집이라는 공간이 없다는 건 붕 떠 있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낯선 공간에서 겪는 일종의 불안감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침에 눈을 떠서 하루하루 규칙적으로 지내보기로 했다.

북해도는 해가 생각보다 일찍 져서 16시가 되면 일이 끝났다. 남은 일은 사진 보정과 업무 정리가 전부였을 때, 시원한 맥주가 당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한 일이다.

소주 두 병은 거뜬히 마실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나는 술에 별 관심이 없다. 사회생활을 하지 않았으면 굳이 술을 마시지 않았을 정도로. 술에 취해 나누는 시답지 않은 농담과 갑자기 생기는 용기, 흔히 말하는 취중진담도 잘 와닿지 않는다. 내가 하면 로맨스인 줄 알았는데 술 깨면 이불을 발로 뻥 차버리고 싶어지니까.

밖에는 폭설이 내리고 있다. 친구들이 ‘오늘 같은 날은 닭볶음탕에 소주가 딱인데’ 같은 말을 해도 공감할 수 없던 내가 ‘이럴 때는 정종인데 말이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뚜벅뚜벅 가까운 편의점에 걸어가 남은 동전으로 맥주 몇 캔을 샀다. 북해도에는 북해도에서만 맛볼 수 있는 맥주를 판매하고 있다. 반 캔 정도 마시려나, 했는데 어느새 두 캔을 비웠다. SNS에 빈 맥주 캔과 도시 배경, 일하는 모습을 찍어 야근 중이라는 멘트를 달아본다. ‘노동주가 이런 맛이구나!’

노동주는 아니지만, ‘노동 음료’의 꿀맛은 안다. 제주에서 일할 때, 바로 앞 친구네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먹는 시간이 있었다. 어느 날, 친구가 한번 마셔보라며 음료 한 잔을 건넸는데 “와! 진짜 힘이 난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힘들고 졸린 오후의 나를 위해 친구가 특별히 준비한 음료였고, 나는 종종 메뉴판에도 없는 그 음료를 찾았다. 그러다 나의 이름을 붙여 ‘엄지에이드’가 되었다. 나른하고 졸린 오후 3시쯤, 에너지가 필요할 때 마시면 좋은 노동 음료로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마시다가 엄지손가락을 불끈 들며 잠에서 깨게 된다.

여름철 샤워하고 나와서 물기만 닦고 홀딱 벗은 채 마시는 맥주 한 잔의 짜릿함, 너무 더운 날 해변에 누워 들이켜는 맥주 한 잔의 시원함, 하루 종일 폭설을 이겨내며 촬영을 끝낸 후 마시는 북해도 맥주까지. 기분 좋게 하는 음료나 술이 곁에 있다는 것, 한두 잔으로 그날을 위로받을 수 있다는 건 소소한 즐거움이 아닐까 싶다. 아, 물론 많이 의존하면 안 되지만.


노동의 맥주 맛을 알아버린 탓에 오타루에 있는 몇 개월 동안 매일 밤을 북해도 맥주와 함께했다. 타지에서 일하면 살이 빠질 거라 생각했는데, 맥주로 튜브를 만들어 귀국했다.


엄지사진관
@fromairplane

제주와 서울에서 누군가의 좋은 시절을 기록하는
스냅 호시절(好時節) 대표.
〈좋은 건 같이 봐요〉, 〈제주는 잘 있습니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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