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손으로 전했던 마음, 그 언어를 담은 영화

2022.10.19




안부를 묻고, 후일을 기약하는 편지를 마지막으로 써본 것이 언제였을까. 좀처럼 기억나지 않는 기억을 더듬어 그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영화를 찾아봤다. 손으로 써 내려간 사연에 소복이 쌓이고 투명하게 맺힌 마음을 떠올리게 만드는 편지에 관한 영화 다섯 편을 전한다.


글ㅣ민용준




살던 집을 떠나던 날, 여자는 우편함에 편지를 남겼다. 새롭게 집을 찾아온 남자가 우편함에서 편지를 발견한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하다. 아직 오지 않은 2년 후 날짜의 편지였던 것. 거짓말처럼 편지에서 말한 날짜에 함박눈이 내리자 남자도 답장을 써서 우편함에 넣었다. 2년 후의 여자와 2년 전의 남자는 그렇게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2년의 시차가 만날 수 없는 두 사람을 점점 외롭게 만든다.

2000년에 개봉한 〈시월애〉는 시간 너머의 남녀가 손으로 쓴 편지를 주고받는다는 설정 자체만으로도 오래된 이야기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면서도, 지금은 형언할 수 없는 애틋함을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담아 주고받던 당대의 정서를 체감할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임을 직감하면서도 동하는 마음을 어쩔 수 없어 자신을 알지 못하는 현재의 상대를 찾아가 부질없는 눈빛을 보내는 인물의 심정에 마음이 저릿한 기분을 느끼는 건 결코 시대착오적인 감각이 아니다. 편지가 어떻게 시간의 장벽을 허문 것인지, ‘말이 되는가’라는 물음은 무색할 뿐이다. 기꺼이 믿고 싶은 낭만이 〈시월애〉에 있다.


‘오겡키데스까’라는 일본어 인사말로 유명한 〈러브레터〉는 풋풋한 첫사랑을 추억하는 대명사로 꼽히는 영화일 것이다. 하지만 다소 오해가 있다. 영화는 2년 전에 사별한 연인의 이름으로 날아온 편지를 받게 된 여자의 사연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저승에서 발신된 것이 아니기에 실제 주소지를 찾아간 여자는 뜻밖의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세상을 떠난 남자친구와 동명이자 자신과 빼닮은 여자가 보낸 편지였다는 사실을, 그리고 애초에 그녀를 좋아했기에 그녀와 닮은 자신을 좋아하게 된 남자친구의 진심을 알게 된다.

〈러브레터〉는 냉정하지만 끝내 애틋한 영화다. 이뤄질 리 없는 첫사랑에 관한 냉정한 시선과 이뤄질 수 없는 첫사랑의 애틋한 심정이 교묘하게 교차한다.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의 첫사랑을 찾아가게 되는 한 여자의 여정은 끝내 자신을 첫 사랑했던 남자의 진심을 알게 되는 다른 여자의 마음으로 종착한다. 전해지지 못한 편지처럼 봉인돼 있던 마음이 끝내 닿고자 하는 마음으로 다다르는 우연과 필연의 여정을 그린다. 그럼으로써 이뤄질 수 없는 첫사랑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래서 더욱 순백하게 간직되는 첫사랑의 순수가 온전히 보존된다.


찰나의 파문이 만들어낸 동심원의 너비는 어디까지 가 닿는 걸까? 이언 매큐언의 소설 〈속죄〉를 영화화한 조 라이트 감독의 〈어톤먼트〉는 한순간의 그릇된 충동에서 비롯된 소녀의 선택이 남녀의 삶을 덧없는 비극으로 몰아넣는 과정을 유려한 화법으로 그려 나간다. 언니에게 전달하길 부탁한 편지를 먼저 뜯어본 소녀는 그 안에 담긴 진심을 들여다보기엔 너무 어렸다. 뜨거운 고백이 아닌 불결한 추파에 가까웠다. 이해보다 오해가 쉬웠다. 그리고 그 오해는 두 남녀의 삶을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틀어버린다.

〈어톤먼트〉는 진심을 왜곡한 마음에서 떨어진 파문을 바탕으로 상상한 절벽 같은 이야기다. 오해는 현실을 왜곡하고 삶을 파괴하지만, 후회는 너무나도 늦고 속죄는 더디다. 찰나로부터 퍼져나간 파문은 비극이든, 희극이든, 그 어떤 것도 꿈꾸거나 선택할 겨를 없이 삶을 수면 밖으로 밀어 보낸다. 삶이란 허구로 귀결될 수 없는 엔딩으로 향하는 실존이라는 사실을 명징하게 깨닫게 만드는 이언 매큐언의 깊고 너른 관점과 시선으로 관통하고 조망한 문장을 유려한 감각으로 구체화한 조 라이트의 역작은 결국 허망하지만 절실한 삶 그 자체를 향한 연서나 다름없다.



역사는 전쟁의 승패를 기록하지만, 전장의 청춘은 늘 생사의 기로를 내달릴 뿐이다. ‘무엇을 위해서 싸우는가’가 아닌 ‘무엇에 의해서 싸우는가’의 아비규환.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서 있는 방향과 겨누는 상대가 다를 뿐 산 자의 시간도 이미 죽음의 그림자로 수렴할 수밖에 없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하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출한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서로를 적으로 마주하던 양 진영의 젊은이들을 살육의 현장으로 내몰았던 지난 광기를 재현한 두 개이자 한 몸의 진혼가다.

이오지마에 상륙한 미군의 시점에서 그린 〈아버지의 깃발〉과 달리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이오지마를 사수하던 일본군 시점을 대변하는 작품이다. 죽음을 각오한 결전이 아니라 죽음에 직면한 개개인의 심리를 파고드는 이 작품은 애꿎은 결기를 강요하는 시대에 맞서는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인간의 심리가 나약한 것이 아니라 존엄한 것임을 새삼 깨닫게 만든다. 제목 그대로 이오지마에 묻힌 채 전해지지 못한 편지를 발굴하는 결말부는 거짓 같은 명예를 두르고 죽어간 청년들을 위해 권하는 뒤늦은 추도일 것이다.


돈을 벌어 금의환향하겠다는 꿈을 품은 삼류 건달의 현실은 만만치 않다. 함께 조직 생활을 시작한 동기는 보스가 됐지만, 자신은 후배들에게도 양아치 취급이나 받는 신세다. 하지만 보스 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들어가면 보상을 두둑이 해주겠다는 제안에 마음이 동한다. 그 와중에 경찰에게서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아내라고 하지만 실상 남이다. 신분을 팔아 위장 결혼을 했기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내다. 하지만 아내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먼 길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아사다 지로의 단편집 〈철도원〉에 수록된 단편소설 〈러브 레터〉를 원작으로 둔 영화 〈파이란〉은 일면식 없는 남자로부터 얻게 된 새로운 생의 기회를 통해 순정을 품게 된 한 여성의 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 한 남자가 체감하는 비절한 감정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다. 대가를 얻기 위해 위장 결혼 상대로 자신의 신분을 팔아넘긴 남자의 선택은 사소했지만, 그것은 여자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래서 여자는 대면할 기회조차 없었던 남편을 그리며 보낼 수 없는 편지를 썼고, 뒤늦게 만난 적 없는 아내의 유골과 편지를 받게 된 남자는 자신의 한심한 삶을 후회한다. 자신을 아끼는 누군가의 마음을 통해 스스로를 아끼지 못했던 자신을 한탄한다. 너무 늦었다는 말이 얼마나 깊고 무거운 슬픔이 될 수 있는지, 〈파이란〉을 보면 안다.


민용준
영화 저널리스트&대중문화 칼럼니스트
@kharismania

13인의 영화감독 인터뷰집 〈어제의 영화. 오늘의 감독. 내일의 대화.〉를 집필했으며 미식 전문 칼럼니스트 아내와 함께 영화로운 만찬 ‘시네밋터블’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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